“쿠바 동포들, 독립 위해 힘 모아”
박요한 미주지역부의장 직무대행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중미·카리브협의회(협의회장 박래곤)가 8월12일 쿠바 바라데로(Varadero, Cardenas, Cuba)에서 개최한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박요한 민주평통 미주지역부의장 직무대행(휴스턴협의회장)이 참석해 축사를 전했다.
미주지역의 13명의 협의회장과 간사, 그리고 김안토니오 쿠바 한인후손회장과 장아델라이다 카르데나스 후손회장을 비롯한 쿠바 한인후손들과 바라데로 한글학교 교사와 학생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광복절 경축식은 정호현 쿠바분회장과 한인 후손 카티아 (Katia)의 진행으로 시작됐다.
박래곤 중미·카리브협의회장은 개회사에서 국가가 힘이 없던 시절 여러분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공적을 찾고, 국가가 힘이 있는 지금 그 희생의 대가를 자손들에게라도 고마움을 전하고자 한다는 국가 보훈부의 이야기를 전하며, 선조들의 희생과 노력을 기억하고 대한민국의 발전을 응원해달라고 요청했다.
박요한 민주평통 미주지역부의장 직무대행(휴스턴협의회장)은 축사를 통해 “오늘, 광복 78주년을 기념하는 소중한 자리에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라고 인사하고 “102년 전, 당시 한반도가 일본의 침략에 시달리던 시기에, 여기 쿠바의 한인동포들은 조국독립을 위해 힘을 모았는데, 그 힘의 실체는 바로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낸 독립자금이었고, 쿠바 동포들이 보낸 독립자금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아 있는 빛나는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며 쿠바의 동포들과 함께 광복절의 의미를 되새겼다.
박 직무대행은 “지난 78년 동안 대한민국은 놀라운 발전을 거듭해 왔다”며 “한국전쟁의 험난한 시간을 거쳐 빠르게 경제적 성장과 민주화를 이루어냈고, 이제는 세계적인 기술력과 문화적 영향력을 가진 나라로써 국제사회에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조국의 발전상을 소개했다.
박 직무대행은 “그러나 이 모든 성취는 우리 한민족의 힘과 희생, 그리고 우리를 지지해 주신 여러분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ㅕ “쿠바 한인동포를 비롯한 8천5백만 대한민족은 마치 하나의 큰 가족처럼 서로의 성장과 번영을 응원하며 함께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박 직무대행은 “남한과 북한, 그리고 전 세계의 모든 이들에게서 우리는 평화와 통일의 소망을 안고 있다. 남북 평화통일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길이며, 우리 모두가 협력하여 이룰 수 있는 큰 목표다. 두 나라의 손을 잡아 함께 가는 그 날이 빨리 찾아왔으면 한다”고 밝히고 쿠바 한인후손들에게 “오늘의 이 자리가 우리 모두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함께 나누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는 말로 축사를 마무리했다.
박 직무대행은 중미카리브협의회 소속 멕시코와 파나마 자문위원들과 함께 문구, 모자, 양말, 의류, 식품 등 5천달러 상당의 물품을 장아델라이다 카르데나스한인후손회장에게 전달했다.
카르데나스한글학교 학생들은 민속무용, 케이팝, 피리 연주 등의 무대를 선보였다.
참석자들은 다함께 아리랑을 부르며 광복절 78주년 기념식을 마무리한 후 문윤미 쿠바 자문위원과 학생들이 준비한 한국 음식을 함께 나누며 교류의 시간을 가졌다.

쿠바 한인 이주 102주년
한인의 쿠바 이주는 1921년 3월25일, 한인 288명이 멕시코 유카탄주를 쿠바 라스투나스 지역의 마나티 항구에 입항하면서 시작됐다.
1921년 6월14일 쿠바 한인의 공식 대표기구로서 대한인국민회 쿠바 지방회를 설립됐다. 이어서 1921년 9월 마나티 지방회가 만들어지고, 1923년 3월 카르데나스 지방회가 만들어진 뒤엔 쿠바 지방회의 이름이 마탄사스 지방회로 바뀌었다.
<시사IN>은 2021년 10월3일자 기사에서 쿠바 한인 독립운동사의 대표적 인물인 임천택 선생(1903~1985년)의 기록을 인용해 “마탄사스 지방회는 의무금을 납부한 회원 30여 명이 1945년까지 약 25년간 지방회 경상비·교육비·외교비 등으로 2만원 가까운 금액을 출연했고 1938년부터 1945년까지 8년 동안 상하이 임정에 1489원 70전을 독립운동 성금으로 납부했다”고 소개했다. <시사IN>은 또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1930년 2월부터 5월까지 광주학생운동 지지 대회를 개최하며 3개 지방회 소속 한인 100여 명이 특별후원금 100달러를 모아서 보내기도 했다. 당시 시세로는 쌀 400가마니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설명했다.


<시사IN>은 “쿠바의 한인들은 독립운동 자금 지원 외에도 민성국어학교, 진성국어학교, 흥민학교 등 한국어와 글, 한국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아울러 ‘친구회’를 조직해 쿠바 현지인에게 한국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설파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시사IN>은 당시 쿠바의 한인들이 보내준 독립자금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를 통해 소개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동북 3성에 250만, 러시아에 150만, 일본에 40~50만의 동포가 있으나 각각의 사정으로 기댈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서 미국 본토와 하와이, 멕시코, 쿠바를 아우르는 1만여 명의 동포 성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솔직히 토로한 바 있다. 그들이 보내온 피 같은 성금으로 임시정부를 꾸리고 윤봉길·이봉창 열사의 거사를 진행한 것이다.
한국정부는 쿠바 한인 33명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했으나 그중 20여 명의 후손에게만 연락이 닿았을 뿐이다. 나머지 다른 후손들은 자기 선조의 역사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양동욱 기자
info@koamjournal.com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Share this content